전설과 판타지의 접점-BBC드라마 멀린(Merlin, 2008) 감상

최근 몰두해서 시청하고 있는, BBC제작 드라마 멀린(Merlin)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아더왕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로 대마법사 멀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순박한 시골소년 멀린이 고향을 떠나 우서왕이 다스리는 카멜롯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멀린이 카멜롯에 도착해서 처음 만난 사건은 다름아닌 공개처형. 처형당한 남자의 죄목은 '마법을 사용한 죄'였다. 카멜롯의 왕 우서는 20년전 드래곤을 물리치고 카멜롯의 평화를 가져온 인물로, 질서 유지를 위해 무엇보다 마법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멀린 소년은, 남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선천적인 마법사였는데, 첫 등장에서 멀린은 마법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초능력, 그 중에서도 염동력자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즉, 아무런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생각만으로 물건을 이동시키는 능력을 보이는데 그 때마다 눈 색이 변하는 것이 특징.
마법이 금지된 도시에서, 마법사로서의 능력을 숨겨야 한다는 것이 멀린이 처한 첫번째 갈등.
그리고 며칠 후, 멀린은 자신의 평생의 동반자(?)인 아더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아더왕 이야기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아더왕의 전설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우서왕이 콘월의 지배자의 아내인 이그레인에게 그릇된 욕정을 품어 마법사 멀린에게 부탁하여 이그레인의 남편의 모습으로 둔갑하고 그녀와 동침, 아더를 잉태했다는 내용이다. 마법에 대한 대가로 멀린은 갓 태어난 아더를 데려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기사의 시종으로 성장하던 아더는 우연히 바위에 뽑힌 엑스칼리버를 뽑고 왕의 자격을 입증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아더왕의 이야기이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보자.
시내를 배회하던 멀린은 기사계급으로 보이는 여러 소년들이 한 소년을 가운데 두고 짓궂은 장난을 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들은 그 소년을 움직이는 과녁삼아 칼을 던지며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정의감에 넘치는 멀린이 여기에 개입한다. 그리고 사소한 시비가 붙어 리더격인 금발의 소년과 사소한 싸움이 붙는데....
그가 바로 왕의 아들인 아더였던 것이다.

원작과는 달리 아더는 처음부터 왕의 아들로 프라이드 높고 무술 실력이 뛰어난 기사로 그려진다. 하지만 성격이 까칠하고 안하무인으로 극 초반 시시건건 멀린과 갈등을 일으키는데, 멀린과 아더가 티격태격하는것이 드라마 초반의 재미 중 하나. 그리고 이 까칠한 왕자님이 점점 왕의 재질을 키워나가는 것이 이 드라마의 큰 줄기 중 하나이다.


아더왕 이야기에는 이들 히로인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아더왕이 첫눈에 반해 결혼하여 카멜롯의 왕비가 되는 귀네비어와 아더왕의 이복누이, 즉 콘월 공작과 이그레인 사이에 태어나 이후 아더의 조카이자 아들이자 적인 모드레드를 낳는 모르가나. 드라마 멀린에는 이 둘 역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조금 다른 점은 모르가나는 우서왕의 부하의 딸로, 현재는 우서왕의 피후견인 자격으로 성에서 함께 살고 있는 인물이며 귀네비어는 성안 대장장이의 딸로 모르가나의 시녀로 등장한다.
좌측 인물이 모르가나, 우측의 아가씨가 귀네비어다. 이후 랜슬롯과 불륜관계에 빠져 카멜롯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국지색 귀네비어말이다. 이 아가씨가 드라마에 등장해서 "전 귀네비어에요, 그웬이라고 불러요"라는 대사를 외쳤을 때 "나의 귀네비어는 이렇지 않아!ㅠㅠ"라고 외쳤을 시청자가 한두명이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아가씨, 예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귀네비어라는 이름보다는 그웬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귀엽고 당차고 용감한 캐릭터로 내심 아더를 살짝 좋아하는 듯도 하고, 멀린을 좋아하는 듯도 하고...
정작 아더는 모르가나에게 반해 있는 상태이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웬과 아더의 관계도 진전되지 않으려나?
다음은 극 중 멀린과 그웬의 대사.

Gwen: (모르가나를 보며) 참 예쁘죠?
Merlin: 그래요.
Gwen: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여왕으로 태어나요.
Merlin: 그렇지 않아요.
Gwen: 나도 언젠간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렇다고 모르가나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구요. 누가 아더와 결혼하고 싶어하겠어요?
Merlin: 설마요, 내가 보기에 당신은 저 호승심 넘치는 왕자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I thought you liked the tough, save-the-world kind of man.)
Gwen: 아니에요, 난 당신처럼 좀 더 평범한 남자가 좋아요.

멀린의 주변에서 그를 서포트해주는 한 명의 인간과 한마리의 용.
가이우스는 왕실의 의사로 약초나 병에 대한 지식 뿐 아니라 마법에 대한 지식도 풍부한 인물. 20년전 카멜롯에서 벌어졌던 마법 축출 사건과도 관련이 있으며 우서와는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이이다. 멀린에게 몰래 마법서를 보여주고 그의 재능을 키워주려는 동시에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재능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제어해주는 역할을 동시에 하는 인물.

그리고, 큰머리 용사마.
20년전 우서에게 붙잡혀 현재는 사슬에 발이 묶인 채 성 아래 던전에 같혀 있다. 이 연금생활에 만족하고 있는지 불만족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유자적 날아다니며 멀린이 찾아올 때마다 이런저런 훈수를 두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일단 용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능력이 있으며 아더가 이후 나라를 통일할 위대한 인물이며 멀린이 그 중추가 될 인물임을 예지하고 멀린에게 그 사명을 이야기해준 존재이기도 하다.
그 외의 인물.
니무에. 20년전 아더의 탄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여자 마법사. 우서의 측근이었으나 우서가 카멜롯에서 마법사를 몰아내면서 우서에게 배신당하고 잠적했다가 다시 등장했다. 여러 가지 흑마법으로 카멜롯을 위험에 빠뜨리는 인물. 그러나 등장하는 여자캐릭터 중에 제일 귀엽다.

그리고, 랜슬롯.
에피소드 5에서 등장. 배우는 무려 산티아고 카브레라님♡(히어로즈의 아이작, 영화 러브앤 트러블의 파올로)
뭐야, 나름 유명한 배우도 나오네!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한회 짜리 특별출연. 기사가 되고 싶어하는 시골출신 평민으로 등장한다.

여기까지의 인물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더왕 전설에서 여러가지 인물 설정이나 모티브만 따왔을 뿐, 아더왕 이야기의 외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아더왕 이야기를 토대로 현실과 판타지를 혼합한 전혀 새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몇 개의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던 것들, 예를들면 1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아더왕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면서 성은 르네상스풍이고 실내장식은 고딕이고 귀네비어는 흑인이고 랜슬롯은 라틴계네. 우서왕의 연회에 모인 여러 귀족들도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용이 등장하면서 납득하기는 했지만. 이 이야기를 시대극이라고 생각하면 당혹감을 느낄거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판타지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는 원작 때문이다. 예를들면, 에피소드 5에서 랜슬롯은 기사가 되기 위해 멀린의 도움으로 귀족증명서를 위조하고 기사 시험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의 갑옷을 만들어주기위해 그웬이 그의 몸 치수를 재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짧지만 강력한 뭔가 둘 사이에 흐르고. 원작을 알고 있는 시청자는 이 장면에서 또 다른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 뿐 아니라 매 에피소드에서 원작에서 중요한 모티브들이 하나씩 등장하는데 원작과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도 은근히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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